[아포리즘 행복수업] 희망이 곧 지혜다

EK BOOK / 기사승인 : 2014-09-20 1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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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즐거운 말을 먹고 자란다

희망



희망은 문명 . 국가 . 회사의 수준을 제는 척도다.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는 오역이라고 한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판도라의 항아리(Pandora’s jar)’라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의 어머니인 판도라가 항아리를 여는 바람에 항 아리에 들어 있던 온갖 나쁜 것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항아리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희망이다. 그래서 인간은 희망으로 세상의 모든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판도라의 항아리에는 나쁜 것만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희망도 나쁜 게 아닐까? 그렇다고 생 각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희망을 거부한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희망은 실상을 못 보게 한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은 주장했다.

“희망은 현실의 벌거벗음을 감추는 자연의 장막이다(Hope is nature’s veil for hiding truth’s nakedness).”

희망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니체도 말했다.

“희망은 나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나쁘다. 희망은 인간의 고통을 연장하기 때문이다(Hope is the worst of evils, for it prolongs the torments of man).”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희망이 크면 절망도 크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말은 수긍이 갈 정도이다.

“희망이 없었던 이에겐 절망도 없다(He who has never hoped can never despair).”

희망은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을 수 있다. 미국 배우인 캐리 스노(Carrie Snow, 1953~ )는 주장했다.

“과학은 희망을 근거로 믿는 것에 대한 거부다(Science is the refusal to believe on the basis of hope).”

희망은 예속의 뿌리가 될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7)는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 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희망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 있다. 알베르 카뮈도 말했다.

“어떤 사건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은 겁쟁이지만 인간 조건에 대한 희망을 지닌 자는 바보다(He who despairs over an event is a coward, but he who holds hope for the human condition is a fool).”



그저 살아 있으면 누구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급진적 사회운동가들도 ‘희망’ 운운하는 것을 싫어할 수 있다. 사람들이 ‘혁명’이라는 희망 외에 다른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영국 속담처럼 말이다.

“희망은 가난한 사람의 양식이다(Hope is the poor man’s bread).”

미국 작가인 잭슨 브라운 2세(H. Jackson Brown Jr.)는 말했다.

“어떤 사람의 희망을 빼앗지 말라. 그는 희망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지 모른다(Never deprive someone of hope; itmight be all they have).”

그러나 희망에 회의적인 사람들은 희망을 털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빅토르 드 비니(Alfred Victor de Vigny, 1797~1863)는 말했다.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에서 희망을 제거해야 한다. 지혜의 핵심은 분노에 찬 발작이나 하늘에 대한 원망이 없는 잔잔한 절망이다(Above all, we must abolish hope in the heart of man. A calm despair, without angry convulsions, without reproaches to Heaven, is the essence of wisdom).”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다. 희망이 판도라의 항아리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희망 행세를 하는 가짜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모든 문제를 삐딱하게 뒤집어 볼 수는 있지만 정설(定說)보다 신기한 이설(異 說)을 너무 좋아하는 것도 화가 될 수 있다.

희망을 믿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희망 앞에서는 부자와 빈자,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의 구별이 사라진다. 희망에는 아무 조건이 없다. 그저 살아 있으면 그만 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희망이 있다(While there’s life, there’s hope).”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가 한 말이다. 게다가 희망은 무한대다. 세네카가 한 말처럼 말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한 모든 것을 희망할 수 있다(All things are to be hoped by a man as long as he is alive).”

물론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He who has health has hope and he who has hope, has everything).”

아랍 속담이다. 희망이 곧 지혜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가 한 말은 그래서 더 그럴듯하다.

“모든 인간의 지혜는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기다림과 희망이다(All human wisdom is summed up in these two words: wait a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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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미덥지 않다면 헬렌 켈러를 보고, 역사를 보라

희망의 효험이 미덥지 않으면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1880~1968)를 보라. 그는 시각과 청각 장애를 희망으로 극복하고 작가, 정치가, 교육자로 활동했다. 그는 희망 앞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사회주의자였던 헬렌 켈러는 이념과 희망이 상극이 아니라는 것도 예시했다. 헬렌 켈러는 말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며, 불가능한 것을 성취한다(Hope sees the invisible, feels the intangible, and achieves the impossible).”

역사를 보라. 희망 성공 사례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말이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Frances Hodgson Burnett, 1849~1924)은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신기한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 다음엔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희망하기 시작한다. 그다음엔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다음엔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목격한다. 그 다음엔 그 일이 수 세기 전에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지 온 세상이 궁금해한다(At first people refuse to believe that a strange new thing can be done, then they begin to hope that it can be done, then they see that it can be done then it is done and all the world wonders why it was not done centuries ago).”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말했다.

“어떤 인간의 희망은 그의 문명의 척도다(A man’s hope measures his civilization).”

희망은 문명과 같은 큰 단위뿐만 아니라 문명의 하위 단위 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국민이 품고 있는 희망을 살피면 국가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재무제표나 수익률, 매출 신장 속도만이 어떤 회사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회사원이 출근할 때 지니고 가는 희망은 그가 속한 회사의 척도다.



김환영박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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